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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창> by 권리
    카테고리 없음 2020. 6. 8. 03:05

     

    모처럼 재밌게 읽은 칼럼

    다시 보고 싶은 문단만 가져와 봤다.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이창] 호기냐, 오기냐

     

     

    부모님은 늘 내게 겸손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말 안 듣는 아이였던 나는 자신 있게 “예!”라고 짧게 대답한 뒤 오만하게 까먹어버렸다. 그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내게 세상이 부모님 대신 벌을 내렸다. 원하는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태백’으로 지내며 주변에 민폐를 끼치게 된 것이다. 날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욕하고 저주하던 난 뜻도 모르는 책들을 읽어가며 바닥난 자존심을 긁어모았다. ‘세상’이란 단어 앞에는 드디어 ‘만만치 않은’ 혹은 ‘빌어먹을’, 그것도 아니면 ‘망할’이란 수식어가 하나씩 붙기 시작했고, 어느덧 나는 남들 눈에는 멀쩡하기만 한 그 ‘세상’과 함께 같이 망해갔다. 그렇게 20대를 보내고 나니, 어느덧 내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루저일 뿐이었다.

    20대를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대학교 4학년 때 일어났다. 기성 작가와 만날 기회가 있어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는 유난히 독설이 심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3시간 동안 앞에 있는 소주병을 깨서 그 인간 머리를 박살낼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그의 말은 가시로 가득했다. 그 말의 요지는 이러했다. ‘작가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세 가지다. 다독, 다작, 다사. 당신은 많이 읽지도 않았고, 많이 쓰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많은 생각도 할 수 없었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작가가 되려 하는가?’ 나의 정수리에 일침을 놓는 그의 말에 난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시간이 넘게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서 펑펑 울었다. 부끄러움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내게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았고, 세상의 쓴맛을 한번 즐겨볼 테냐 하는 태도로 날 쳐다보았다. 난 그 눈빛을 평생 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내가 그토록 원망하며 찾아 헤매던 세상의 악마였다.

    어떻게든 그 악마의 말이 틀렸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콤플렉스를 침처럼 삼키고 눈빛에 독기를 가득 품은 채 책을 읽고 글을 썼던 내게 세상은 차갑게 응수했다. 내가 문학에 대해 신앙심 대신 앙심을 품을수록 악마는 ‘헤헤헤’ 웃으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난 자연스럽게 오만함을 온몸에 향수처럼 뿌려대기 시작했고 독기를 문신처럼 몸에 지녔다. 내 주위엔 오만한 녀석들 말곤 없었고, 나 자신도 오만함으로 치자면 세계 챔피언감이었다. 그리고 그 오만함마저 사랑스러운 20대의 자신감이라고 감싸안아버렸다(감쌀 게 따로 있지!). 세상의 필요가 아니라 본인만의 필요에 의한 방어기제는 대체로 자기 발등을 찍는 결과를 갖고 온다. 대표적으로 자기 연민이 그러하다. 난 수도 없이 내 목을 졸랐지만, 결국엔 부끄러움에 복받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채 숱한 밤을 불면으로 지새웠다.

    이 글을 보는 어떤 20대는 굉장히 발랄하고 자신감이 넘칠 것이다. 그 자신감을 사랑한다. 하지만 어떤 20대는 굉장히 침울해 있고 열등감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 열등감 역시 사랑스럽다. 사실 자신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아직 무언가를 이뤄가는 시기인 20대의 호주머니에 그 동전이 가득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동전들을 가득 지닌 당신에게 어떤 좌절 앞에서도 초라해지지 말라는 조언을 할 만큼 난 떳떳하지 못하다. 대신 좌절을 통해 호기를 배우라고 말해주고 싶다. 살다보면 언젠가는 자살에 관한 뉴스가 유난히 크게 들려올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크게 절망하고 자신의 호기를 접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쉽게 오기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오만함의 늪에 한번 빠지면 자신의 인생을 타인의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난 오랫동안 타인으로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비로소 얼마 전에부터야 난 굉장히 낯선 인생을 살기 시작했지만, 그 낯섦마저 배움이 되고 있다. 바보의 말이 언젠가 당신에게 가닿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당신은 조금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으니까.

     

     

    [이창] 캐주얼이 좋아?

     

     

    우리는 경험이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 길거리에서 사자를 만나는 일보다 연예인의 ‘쌩얼’이나 지난달 휴대폰 요금 청구서를 보는 일이 더 충격적이다. 애인과의 데이트 같은 다이내믹한 경험조차 점점 형식이 간소해지고 있다. 고작해야 점심 먹고 영화 보고 저녁 먹고 헤어지는 게 전부다. 이보다 더 욕심을 내 동물원에 놀러갈 수도 있겠지만 사자가 밥 먹고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고 나면 ‘차라리 DVD방에나 갈걸 그랬어’란 생각이 떠오르고 말 것이다. 무모한 경험, 즉 모험은 거의 엄두도 내지 못한다. 자이로드롭이나 번지점프? 모험이 이렇게 안전할 수가 없다(물론 가끔 시민을 경악하게 하는 안전사고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놀 거리가 많은 시대에 경험할 만한 일이 이리도 없다니,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창] 여자가 가져야 할 적절한 페티시즘의 예

     

     

    요컨대 내가 보고 싶은 에로영화는 여성의 성감대를 부위별로 건드려주는 것들이다. 여성은 남성만큼 성감대가 집중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분산돼 있다. 그러므로 몸과 눈을 자극하는 다정한 일대일 서비스가 필요하다. 고로 기존의 남성 취향 에로영화들은 눈에서 성기까지 흥분을 모셔다주는 서비스 부문에선 매우 불친절하다고 볼 수 있다. 남성의 입으로 여성의 가슴이나 성기를 애무하는 장면은 식상하기 짝이 없다. 매일 욕실에서 보는 모습인데 부감 혹은 앙각 등 카메라워크상의 장난이 새로워 보일 리 없지 않은가. 남성용 코팩이 나온 지도 한참 지났는데, 여성 취향의 페티시 메뉴는 왜 이리 더디게 나오는지. 남성의 손가락이나, 목젖, 귀털 혹은 속눈썹이 에로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멋진 에로영화 감독이 나왔으면 좋겠다. 손님 입장에서 다양하고 신선한 메뉴를 찾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이창] 세상을 보는 흐리멍덩한 눈

     

     

    김지운 감독의 <숏컷>을 읽다가 재밌는 내용을 발견했다. 서유럽을 여행하면서 그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이 완전히 맑게 풀린 서양인들의 ‘눈’이었다는 것이다. 우연찮게 <Pale blue eyes> 라는 노래도 생각나고, 과거에 만난 서양 친구들의 흐리멍덩한 눈도 떠올라 모처럼 깔깔 웃었다. 동시에 서양인들은 한국인들과는 차원 다른 교육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예문: 다니엘, 눈에 힘 좀 풀고 다녀! 무슨 어린애가 두눈 똑바로 뜨고 다니니? 눈빛에 베겠다!).

    잘나가는 할리우드 배우들만 봐도 확실히 눈이 풀려 있다. 스칼렛 요한슨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그녀의 눈은 몸매나 입술에서 풍겨지는 섹시함을 압도한다. 퇴폐적이고 침침해 보이는 듯하면서도, 그 흐리멍덩함 속에 묘한 집중력을 갖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당기는 힘이 있는 눈. 마치 시력검사를 할 때 “멀리 보세요!”란 말에 반응하는 사람의 눈처럼 아득해 보인다. 한국인에게 잘 없는 눈이다. 나만 해도 늘 ‘눈에 힘 똑바로 주고 다니지 않으면 누가 코를 베어갈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기만도 수백번, 귀에 못이 박혀 이젠 액자를 걸어도 될 정도다(물론 예외도 있다. 예전에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돌아가시기 직전의 눈이 그랬으니까).

     

     

    [이창] 미묘함의 묘미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자신만 알고 있는 자신의 독특함을 주인공이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대개 발광한다. 자신이 완벽히 외롭지만은 않단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면 금상첨화다. 발자크던가 발작 선생이 말씀하시길, 타인 없이 성격 없다 하셨다. 자신을 정말 모르겠다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주는 미묘한 타인을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리고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밀하게 관찰한 다음, 각자가 상정한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그의 미묘한 성격을 탐구해보자. 멀쩡해 보이던 사람도 단 몇초 만에 변태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게 몇명쯤 관찰하다보면 평범한 인간이 하나도 없으며 그로 인해 훨씬 세상이 재미나단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창] 개성없는 거리는 슬프다

     

     

    노는 개성이 없는 거리는 왠지 슬퍼 보인다. 가끔 대학가를 걷는 학생들을 보며 난 이런 생각을 한다. 저 학생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국 명문대 앞을 활보하는 꿈을 꾸며 토플 점수 올리는 법을 고민하고 있을까, 아니면 취업 걱정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한번이라도 자신들이 학교 앞의 거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을까. 학교를 나선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곤 기껏해야 만화방, 비디오방, 노래방, 당구장 등 극히 폐쇄되고 억압된 공간일 뿐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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